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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통합적인 우리 문화

미국에 와서 살면서 문화라는 개념을 어느 때보다 더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자녀를 교육하는 환경으로서의 문화는 무엇이고, 그 차이가 과연 교육에서 어떤 결과를 만드는가는 늘 나의 관심이 되어왔다. 한국식으로 하면 좋은 방법과 미국식으로 하면 좋은 방법은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그 방법들을 적용해야 하는가, 부모와 자녀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두 문화의 장점만을 추출하여 자녀에게 유익한 것을 주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은 늘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근래에 학문과 교육에서 '융합'과 '통합'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음을 알게 되었다. 학문 사이의 교류가 통합으로 가면서, 세상은 이제 한 가지만을 잘 하는 사람보다는 여러 방면을 두루 알아 통찰력 있게 세상을 보면서, 전에 없던 것을 새로 창조하는 사람을 원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우리 문화가 본래 통합적이었으며, 서로 다른 것을 단순히 분리하기보다는 세상의 부분으로서 연결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많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미국에는 모든 상황에 대해 낱낱이 서술하고 대비하는 규정들이 한국에 비해 많다. 기술적으로 절차를 밟아야 할 일들에 관해 정해 놓은 규정들은 그 존재 가치가 이해가 가지만, 어떤 규정들은 기술과 절차 이전에 가치관과 의식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인데도 기술적인 접근을 하는 것 같아 아쉬울 때가 있다. 한 예로 학교에서는 친구들을 말로 괴롭히거나, 힘으로 괴롭히면 어떤 징계를 받고, 학교의 교칙을 어기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된다고 일일이 명시하고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는 서명도 받는다. 그러면 나는 그런 세세한 규정 없이도 약자를 보호하고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고 배웠던 어릴 적 한국의 교육이 그립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가족, 사회, 국가로 연결된 동심원의 관계와 연대감을 가르치는 분위기에서 성장한 내 눈에는 '독립'과 '자유' 같은 가치들을 아직 분별력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규정에 의해 정해진 것 외에는 좀처럼 하지 않으려 하고, 작은 일에도 책임을 따지는 분위기는 준법 정신을 키워주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기능도 있으나, 창의력을 키우지 못하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람과 일을 사랑하게 하지 못할 때도 많다. 자기가 필요한 약을 안가져 온 항공기 승객이 옆 좌석의 승객이 그 약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는 얻어서 먹으려 해도, 의사의 진단없이는 절대 약을 못먹게 했던 승무원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규정을 지킨 그 승무원은 잘 한 것일까?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는 통합적 사고 없이,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한 예이다. 서구인들이 주로 관찰하고 분류하여, 체계를 세우고 그러면서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정확히 수치화하여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전통적으로 만물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통합적으로 우주가 돌아간다는 관점 아래, 한 부분을 잘 되게 하려면 전체가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두통이 있을 때, 두통을 직접 치료하는 양약과 온몸의 기를 잘 순환하도록 하여 건강을 찾는 한약은 그 상징과도 같다. 우리 문화는 오래 전부터 통합 지향적이었으며, 그 뿌리를 이미 인문학에 두고 있었는데도 서구 합리주의와 과학기술 만능주의로 인해 우리가 그것을 잊고 있다가, 근래 들어 그것이 마치 서구에서의 시행착오 끝에 찾아진 개념이라고 여기면서 호들갑을 떠는것은 아닐까? 부모와 내가 하나이고, 주변의 친구와 사회 구성원들도 모두 하나로 여기어 함께 잘 살아야 함을 가르치면 좋겠다. 법만이 아니라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남을 이겨야 기쁜 것이 아니라 함께 잘 되어야 행복함을 알려주면 좋겠다. 김정수 에듀워싱턴 디렉터, info@eduwashington.com

2012-06-04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TJ고, 입학보다 졸업

TJ(토마스제퍼슨 과학기술고)에 입학한 후, 공부하기가 힘들어서 좌절하고 고민하는 학생이 많다는 기사가 있었다. 미국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 고등학교로 인정받는 TJ를 입학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잠시이고, 해야 할 공부의 많은 양과 어려운 내용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알기로도 일부 학생들은 기대한 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해서 학교를 스스로 떠나는 경우가 있으며, 다닌다 해도 학교 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공부의 압박감에 짓눌려서 즐거운 학창 시절을 못누리기도 한다. TJ는 수학과 과학 분야에 재능과 적성이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교육하고자 설립됬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저 우수 학교 또는 명문학교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학교 이름도 과학고이지만, 학교의 명성만을 중시하면서 자녀의 적성을 잘 모른채 가도록 했다가 한숨을 쉬는 경우도 있다. 어느 누구도 자녀가 명문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할 리 없으며, 또 그 학교에서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달갑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힘든 일을 겪고 있는 학생들과 부모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서로 응원하여 힘든 상황을 이겨내도록 격려할 일이지, 잘못된 선택이었다며 책망하고 괴로워할 일만은 아니다. TJ를 졸업한 나의 아들도 9학년과 10학년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다녀서 학교로부터 경고를 받았으며, 잠시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었다. 10학년이 될 무렵, 좋지 않은 성적을 계속 기록하기보다는 전학을 가는 것이 차라리 좋겠다는 말을 하던 아들의 얼굴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교육의 목표가 좋은 성적 그 자체만은 분명 아니기에, 나는 계속 학교를 다니도록 말하고, 좀 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면서, 공부 방법 및 질을 변화시키도록 주문했다. 아들은 조금씩 변했다. 다른 친구들 따라서 어려운 과목을 수강하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수강하면서 공부의 압박감을 줄였다. 나는 아들이 뛰어난 성적으로 고교 과정을 마치지는 않았지만, 힘든 학교 생활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서 마무리한 것을 진정한 배움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사람들에게 입학보다는 졸업을 염두에 두라고 말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평판을 가진 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란다. 세상이 알아주는 학교를 입학하면 자녀의 미래가 더 좋아질 것이며, 가르친 보람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입학이 아니라 졸업을 염두에 두고 진학을 결정하면 좋겠다. 입학만 하면 어떻게든 공부하여 좋은 결과를 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는 그 학교가 어느 정도로 학생들에게 공부를 하게 하는지, 자녀의 적성과 재능은 어디에 있는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한 조사에서 명문대에 진학한 한인 학생들의 45%가 졸업을 못하고 중퇴한다는 결과가 나왔던 것도 모두 졸업보다는 입학만을 생각했기에 일어난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적성을 알고, 진학 후에는 충분하게 학교 공부를 소화하고 학교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부모의 지도가 있어야 한다. 우수한 GPA와 SAT 점수, 뛰어난 특별활동과 감동적인 에세이만이 실력은 아니다. 주어진 과제를 정해진 시간 안에 스스로 해내는 추진력, 힘든 상황을 견디는 인내심,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라도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는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 내 자녀의 지금 모습으로 미래의 모습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진학하여 견딜 정도의 스트레스 속에 공부하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이끌면 좋겠다. 또 그런 능력을 심어주어야 한다.

2012-05-07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읽고, 또 읽어라.

우리 가족이 페어팩스 카운티로 이사를 오자마자 한 일 가운데 하나가 도서관에 가서 도서관 이용 카드를 만든 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보다는 서점에서 가서 새 책을 구입하여 읽기를 좋아했지만, 수시로 읽을 그 많은 책들을 모두 사서 볼 필요는 없기에 대개는 도서관의 책을 대출해서 읽도록 했다. 원하는 책이 어느 도서관에 있는지 집에서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한 후, 도서관의 위치를 확인하고 아들과 찾아나서는 길은 늘 즐거웠다. 아주 바빠서 필요한 책만을 빌려나올 때가 아니라면, 우리 가족은 도서관에 도착하여 책을 찾고나면 이산 가족이 되곤 했다. 보통 한시간 이상을 머무르면서 각자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과 잡지 등을 읽었다. 책이 꼽혀 있는 서가에서 이 책 저 책을 찾으면서 아들과 나지막하게 수다를 떨 때, 나는 어린 아들이 평생 도서관을 가까이 하고 책을 사랑하기를 원했다. 오랜 책들에서 나는 냄새를 편하게 여기고, 한번 읽고 난 책들도 짐으로만 여기지 않으며, 자신에게 기쁨을 준 책을 친구에게도 권하고, 나는 줄 수 없는 지혜를 항상 책으로부터 찾기를 바랬다. 언제였던가, 아빠를 이기기 위해 '체스에서 이기는 법,' '체스 고수되는 법' 등 몇권의 책을 빌려서 수일 동안 읽고난 후부터 다시는 나를 상대로 지지 않았던 일을 통해 아들은 책이 공부나 지적인 발전만을 위함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많은 일에서도 유용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책 읽기로부터 즐거움과 더불어 '정보'의 활용 방법을 익힌 아들은 점점 몰랐던 것을 아는 기쁨으로부터 나아가 무엇이든 '더 잘 하기 위해' 새 정보를 습득하고 활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에게 책 읽기가 준 가장 큰 선물은 아무래도 작문 능력의 향상이라 하겠다. 아들은 학교 공부를 내가 바라는만큼 열심히 하지는 않은 반면, 독서는 비교적 꾸준하게 했다. 한 분야의 책을 집중하여 읽기보다는 두루 두루 가리지 않고 책을 읽은 덕에 고교생이 되어서는 글쓰는데 가졌던 두려움을 제법 없애기 시작했다. 아주 빼어나게 글을 잘 쓰지는 못했지만, 전에 읽은 것들을 토대로 다양한 근거와 예를 제시하여 글의 흐름을 매끄럽게 이끄는데에는 그 전에 읽었던 책들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인상적이었던 일은 고전을 한참 읽을 때 아들이 썼던 글과 흥미 위주의 논픽션등을 읽을 때 썼던 글들의 문장과 깊이가 현격하게 달랐던 점이다. 무엇을 읽는가가 작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나는 그 때 생생하게 보았다.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논리적으로 읽는이를 공감하게 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설득력있게 제시하여야 한다. 당장에는 소용없어 보이는 다른 나라의 역사와 고전 소설들, 세계 경제의 변화와 지구 곳곳의 소식들도 알아야 하고 다가오는 선거에 관하여도 읽어야 한다. 한국, 일본, 중국의 위치만 아는 사람과 그 나라들의 역사를 아는 사람, 그리고 현재의 상황도 아는 사람이 쓴 글의 깊이는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잡지를 수년간 구독한 가정의 어린 아들이 세계 곳곳의 자연과 문화를 자세히 아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세계와 인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또 고교시절에 저명한 언론인들이 쓴 책을 계속 읽은 후, 세계 문제를 보는 눈을 키운 딸이 대학에서도 꾸준하게 시사 문제에 대한 이해를 넓혀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모습도 보았다. 많이 읽는 것은 이처럼 발전적이면서도 정직하게 결과를 만든다. 오늘 많이 읽는 것이 내일 잘 쓰게 되는 길임을 안다면, 도서관으로 가야한다. 서점으로 가야한다. 그리고 읽고 또 읽어야 한다.

2012-04-30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너는 믿어도…

“아빠 저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은 순전히 그 선생님 탓이에요.” 아들이 불만에 찬 얼굴로 투덜거릴 때, 나는 아들의 편을 무조건 들어줄 수 없었다. 학교 행사 준비를 할 때, 전통적으로 학생들이 해오던 일들을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직접 챙기면서 통제하시려 했을 때, 그것이 불만이었던 아들은 혼자 복도를 걸으면서 중얼 중얼 선생님을 비난했는데, 지나가던 학부모가 우연히 그것을 듣고 학교에 알린 적이 있었다. 학교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불편한 나에게 아들은 모든 것이 그 선생님의 탓이라고 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네 말을 어찌 다 믿니?’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그 선생님께서 원인 제공을 한 것이라면서,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카운슬러 선생님도 그런 일로 부모를 오게 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펴는 아들은 자신의 중얼거림을 학교에 알린 그 학부모도 맹비난했다. “아빠 생각에는 원인 제공을 네가 한 것 같은데?” 아들은 자기 편을 안들어주는 나를 원망하면서 야속하다는 눈빛을 보였지만, 당연히 나는 학교에 가 교장 선생님과 학생처 선생님들과 회의를 하면서 아들 편을 들지 않고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선처를 구했었다. 잘못은 잘못이니까.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과 선처 호소 때문이었는지, 학교 당국은 공식 징계는 없이, 비공식적으로 징계를 하면서 일이 마무리 되었다. 그것은 아들이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고 오래 준비했던 행사에 출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종종 그 때 이야기를 한다. 왜 자기 편을 좀 더 안들어주었냐고. 그 당시 그 선생님께서도 어린 자기에게 심한 말씀을 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도 힘들었으니, 아빠는 당연히 자신의 편을 들어 학교에 항의를 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대답은 늘 같다. “네가 더 커서 어른이 되면 안다. 아무리 말해도 지금은 몰라. 나는 수도 없이 말했다.” 성장기의 자녀들은 대체로 자신을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생각한다. 어리고 분별력이 없으니, 모두 남의 탓이다. 친구 탓이고, 선생님 탓이고, 교재 탓이다. 부모 탓이고, 자신의 외모 탓이다. 학교 탓이며, 입시 제도와 살고 있는 시대의 탓이다. 나는 '내 탓이오'하는 청소년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러니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다가는 큰 일이 날 수도 있다. 자녀들이 하는 말은 오직 그들의 관점일 뿐, 사실은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 무렵 성장기에는 아직 생각이 부족한 아이들이 자신을 방어한답시고 거의 모두 때때로 그런 양상을 보인다. 미국의 교육 제도와 문화를 낱낱이 알 수 없는 부모를 상대로 자녀들은 더욱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사실인 양 전한다. 때로는 한번 했던 자신의 말을 방어하느라 연쇄적으로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평소 생활에서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흔들림없이 바른 판단을 하는 지혜를 가지면 좋겠다. 자녀 주위의 지도자들을 신뢰하고 협력하여, 자녀들이 잘못 전하는 이야기도 가릴 줄 알아야 하며, 그 맘 때 아이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불필요한 일이 안생기도록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 자녀를 믿는다는 것은 자녀가 바르게 자라 결국 잘 살 것이라고 믿는 것이지, 어린 자녀의 말을 모두 덤썩 사실로 믿는 것은 아니다.

2012-04-23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공부가 유세할 일이냐?"

아들이 공부한답시고, 집안일 돕기를 거부하려 하면 나는 어김없이 한마디 했다. "공부한다고 무슨 유세하는 거냐?" ‘유세(有勢)하다’ 라는 말의 사전 적 의미는 ‘자랑삼아 세력을 보이다’이다. 내가 그 말을 하면, 아들은 ‘또 그 말씀이냐’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지못해 일을 돕곤 했다. 때로는 아들이 시험을 앞두고 제법 바쁠 때조차 나는 평소대로 아들에게 쓰레기를 버리게 하고, 재활용품을 함께 밖으로 내어 놓게 했다. 공부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나, 가족의 도리를 아는 것도 중요한 것이어서, 나는 아들이 공부한답시고 다른 일들을 미루거나 안하다가, 결국은 그것을 모른채 성장할까 봐 늘 경계했다. 나는 우리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무엇을 하는지 알고, 도움이 필요할 때 크고 작은 일을 서로 돕기를 원했다. 가족이니까. 공부하는 자녀가 언제부터인가 한 가정에서 상전 행세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아빠는 TV소리를 낮추고, 딸이 공부하면 엄마도 자지 않고 밤을 새운다. 수험생은 집안 가족 모임에도 안나가고, 경조사 참석도 면제(?) 받는다. 공부하느라 피곤한 아들은 방 청소를 안하고, 옷가지를 정리 안해도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시험 앞둔 딸이 먹고 싶어하는 것이 식탁에 오르고, 어린 동생들은 형이 공부할 때면 장난도 못하고 숨을 죽여야 한다. 공부하는 딸은 아빠가 퇴근해도 나와보지를 않지만, 공부하다 돌아온 딸을 부모들은 앉아서 맞이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공부하는 자녀들이 더 윗사람 같다. 공부는 누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해 하는 것 아닌가? 어린 자녀들은 자신의 공부하는 것이 마치 부모의 바램을 들어주는 것처럼 말하면서, 종종 부모들을 향해 말도 안되는 불평을 한다.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충고하는 부모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부모 마음을 아프게도 한다. 잠깐이면 될 일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할 일이 많아서 못한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기 뜻대로 무슨 일이 안되면 공연히 부모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평소에 수도 없이 부모가 말하던 것을 안할 때는 언제고, 결과가 아쉬우면 부모 앞에서 속상한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사실, 그 때가 그럴 때이기는 하다. 그 나이에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뒤로 하고, 공부만 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또 요즘은 공부만 하기 보다는 많은 다른 활동도 동시에 하기에 여간 힘들지 않다. 부모들 자랄 때의 한국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러나 자녀들이 공부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핑계 삼아서나, 자신의 성취에 따른 피곤 등을 빌미로 바른 품성과 좋은 습관을 들일 기회를 잃어서는 안된다. 자신들을 위해 밤낮없이 애쓰고,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부모의 마음을 항상 헤아리도록 이끌어야 한다. 부모의 수고를 감사하고 가족의 연대감으로 모든 일을 함께 하려는 마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후에 사회 생활을 할 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 능력을 키워주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우리 자녀들이 과연 공부만 잘 하면 되는 것일까? 공부만 잘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주변 사람들이 환영할까? 공부를 잘 해 좋은 성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잠시 뒤로 미루어도 되는 것일까?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은근히 조장하는 가운데, 우리 자녀들이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져서 결국에는 마땅히 배워서 익혀야 할 가치와 도리들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고싶다.

2012-03-12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미국에서도 바쁘다

한국 아이들이 미국에 가면 힘들이지 않고 모두 공부를 잘 해서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을 간다고 들었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한결같이, 미국에만 가면 모두들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다. 그 곳은 영어를 쓰는 곳이 아니던가? 어떻게 한국 아이가 미국 가서 뒤늦게 영어를 익혀 공부하는데 그렇게 잘 할 수가 있을까, 나는 항상 그것이 알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 아이들의 두뇌가 우수하다고 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한국 아이들이 근면하고 끈기 있게 공부를 하기에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이유로 좋은 결과가 나오든지, 그 당시 나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에서 12년이 넘게 사는 동안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대학생이 되고, 다른 가정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런 궁금증이 많이 해소되었다. 미국에 왔다고 모두가 다 우수한 성적을 만들지는 않는다. 수많은 학생들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소수의 학생들만이 우수한 평가를 받는다. 미국에 온 후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바라는 만큼 영어가 안되어 마음 고생을 하는 학생들은 주위에 제법 많다. 일상 생활하는 수준, 학교 성적 잘 받는 수준, 미국 학생들과 견주어 쳐지지 않는 수준, 문화와 의식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여 이를 토대로 미국 학생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영어는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각 단계마다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미국 학생들을 능가하는 결과를 만들고자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학생 또한 많다. 미국에 오면 '자동으로' '모두가'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래서 옳지 않은 말이다. 한마디로 바쁘게 노력하여 만드는 결과이다. 한편, 한국의 지나친 사교육이 만드는 부작용을 피하고자 미국에 온 가정의 자녀들 중에서 상당수는 미국에 와서도 어쩔 수 없이 사교육을 받는다. 다른 언어와 다른 제도 속에 진행되는 교육 현장에 이제 막 도착한 학생들은 도움이 절실하다. 상대적으로 적응을 잘한 자녀들 부모들도 자녀가 더 앞서가기를 희망하면서 또 사교육을 찾는다. AP 수업을 몇 개 수강하여 어느 수준의 학교에 함격했다는 정보를 들으면, 자기 자녀에게는 한 두개를 더 수강하도록 권한다. 열심히 공부하여 응시했던 SAT시험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부모들은 자녀에게 은근히 학원을 가서 공부하여 점수를 향상시키기를 원한다. 거기에 미국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활동을 요구한다. 악기도 하나 배우게 하고, 운동도 시켜야 한다. 배운 악기로는 오케스트라 활동에 참여하고, 운동을 하느라 주말에도 움직여야 한다. 미술을 하는 학생은 주말에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연극을 하고, 뮤지컬을 하다가, 이번에는 자원봉사를 한다. 사회의 한 쪽, 평소에 관심을 못가지는 분야의 현장에 가서 타인을 위해 시간을 쓴다. 방학에는 인턴쉽을 하고 각종 캠프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 대중 교통이 보편적이지 않은 미국에서 학생들의 바쁜 정도는 부모의 바쁜 정도와 동일하다. 정말 이제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한국에서보다 쉽거나 편할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한국인 부모들의 열심과 욕심은 자녀들이 지구촌의 어디서 공부하든지 똑같이 적용되어 항상 바쁠 것 같다. 김정수 에듀워싱턴 디렉터 info@eduwashington.com

2012-02-27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왜 일찍 일어나야 해요?"

아침 다섯시 사십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나를 '아침형'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 시간에 눈을 떠도 출근해서 일을 시작하는 것은 여섯시 오십분 무렵이다. 일곱시부터 일하는 셈이다. 여덟시부터 업무를 시작하는 미국의 많은 직장인들보다 겨우 한시간 빨리 시작하는 것이다. 더 일찍 일어나 새벽부터 하루를 준비하는 분들이 들으시면 웃을 일이다. 그런데 아침에 규칙적으로 일어나려면 밤에 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여섯 시간 정도를 자는 나는 자정 무렵에는 잠자리에 드는 편이다. 그런 나에게 아들은 자주 말한다. "아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것이 뭐가 다른가요? 왜 굳이 아빠는 그 시간이면 하시던 일을 멈추고 주무셔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들의 논리는 수면 시간이 동일하면 굳이 일찍 잘 이유가 없으며,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게으르다거나 시간 관리를 잘 하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아들이 성장함에 따라 아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자기 할 일을 제 때 하도록 조금씩 통제를 거두어들였다. 학교에서 집에 오면 무조건 그 날의 숙제부터 하도록 했던 우리 가정의 규칙도 아들이 중학교에 가서부터는 없앴으며, 아들이 밖에서 친구들과 놀아도 그저 돌아와서 할 것을 기대하고 걱정을 안했다. 과학고를 지원했던 아들이 시험 준비를 성실하게 하지 않을 때에도 본인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학원을 보내거나 개인 교습을 시키지 않았다. 거실에 두고 쓰게 하던 컴퓨터를 12학년 때부터는 자기 방에서 쓰게 했으며, 다소 지저분하게 아들이 포스터를 자기 방 벽에 붙여도 아무 말을 안했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좋았을 것을, 그리 열심 없이 준비하여 SAT를 보았을 때에도 나는 아들이 스스로 더 열심히 하기를 말했을 뿐, 학원으로 이끌지는 않았다. 대신에, 자라나는 아들이 조금씩 더 주어지는 '자유'를 잘 이해하여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 방법도 자기 힘으로 찾아내기를 주문했다.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일은 더우기 '자유'가 중요했다. 작곡을 하고, 편곡을 하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 좋아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유'를 전제로한 창의성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유'를 아들에게 준 반면, 아들은 조금씩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았다. 할 일을 미루었다가 막판에 하는 일은 다반사였고, 기분 내키는대로 새벽까지 잠을 안자면서 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아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를 못했고, 점점 그것은 횟수를 더했다. 그것은 게으름이었다. 나는 자유를 주었지 게으름을 허락하지는 않았는데, 아들은 자꾸 시간을 바르게 쓰지 못하는 듯 했다. 그리고 아들과의 이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 많은 청소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의 의미를 잘 모른다. 성장함에 따라 조금씩 더 주어지는 자유가 스스로를 통제하는 연습으로 쓰여야 하는데, 마구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만일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불규칙한 생활 속에 게을러도 좋다는 것 쯤으로 이해한다면, 그 자유는 독으로 작용하여 현재 할 일을 놓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망치게 할 수밖에 없다. 충분히 수면을 취한 후 일찍 일어나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고, 머리가 맑을 때 생산적으로 공부하고 일하는 것, 세상이 활력적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자기도 깨어서 함께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정해진 시간에 꾸준하게 계획대로 일하고 공부하는 훈련은 사실 쉽지 않다. 자유를 부여하고 나서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자녀가 스스로 하게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자유는 그것을 사용하여 이로운 결과를 낼 때만이 의미가 있다. 김정수 에듀워싱턴 디렉터 info@eduwashington.com

2012-02-21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스티브잡스의 고교 성적

스티브 잡스의 고교 시절 성적은 4.0 만점에 2.65였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신제품을 발표할 때마다 화제를 모았던 그의 고교 성적이 고작 2.65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은 학교 성적이 안좋았던 그였지만, 일찍부터 컴퓨터를 접하고, 어릴 때부터 기업 현장을 경험한 것이 그의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의 전문 분야가 첨단 기술이었던 탓에, 그가 고교 시절에 상당히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랄 뿐이다. 한번 읽어보라며 아들이 놓고 간 그의 전기를 아직도 읽지 않았지만, 수도 없이 언론에서 그에 관한 기사를 내어보낸 탓에 나는 종종 그 책을 읽은 듯 착각을 하곤 한다. 조금 들어 아는 것만으로도 그의 일생은 그가 선도했던 기술 분야에서의 성공만큼이나 놀랍다. 나의 눈길을 끌었던 그의 이야기 중 하나는 그가 사람을 기용하거나 일을 그만두게 할 때, 상당히 독단적이고 괴퍅하게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철저히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여, 즉흥적으로 과격한 인사를 시행한 그의 방식을 두고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적을 만들어 곤란한 일을 겪을 수 있다”고 했을 때 아들은 “어쨌거나 그는 성공했다”면서, “그의 방법이 효과적이었기에 그가 성공했다”고 우겼다. 이제는 스티브 잡스의 고교 성적이 그렇게 안좋았으니, 안좋은 성적도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하는 자녀들이 분명히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단점과 문제는 그것을 극복하거나 보완할 엄청난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편, 고교 성적이 저조했던 스티브 잡스가 그런 성취를 이룬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타고난 천재성 덕이지만, 사회적으로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모든 것을 남 따라 함께 할 때 안도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가 편치 않다. 남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편안한 곳에서는 처음 가는 길을 가려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올 수 없다. 학교 성적이 전반적으로 한 학생의 우수함과 성실함의 정도를 드러내 보이기는 해도, 숨어있는 잠재력을 모두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회가 제이 제삼의 스티브 잡스를 배출할 수 있다. 오직 '유행'만을 따라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색깔의 옷도 입어야만 하는 사회에서 자라는 학생들이 자기 색깔을 가진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 때 마약에 빠지고, 히피 문화에도 탐닉했던 사람,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의 아이디어라도 그 안에 담긴 유용한 가치를 식별해내는 사회여야 한다. 장점보다는 약점에 눈을 맞추고, 어느 시기의 실수와 방심으로 만들어진 좋지 않은 기록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모두가 서로 다른 가정에 태어나 다른 환경에서 자라므로, 지금 보이는 각자의 모습에 또다른 조건을 부어준다면 분명히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난 30년 동안의 기술 발전 속도를 보건데, 앞으로 다가올 기술의 발전과 다양성에 기초한 문화의 변동은 우리에게 더 열린 사고를 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에서 자라 어른이 된 후,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우리들에게는 더욱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info@eduwashington.com

2012-02-14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정리 정돈

교과서와 참고서, 공책들이 책상 위에 질서없이 쌓여있고, 벽에는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콘서트 포스터가 3개나 붙어있다. 학교에서 받은 각종 유인물들이 대충 한쪽에 모아져 있고, 필기구도 이 곳 저 곳에 있다. 한번 쯤 더 보고 공부하면 좋았을, 채점된 시험지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빈 잔과 음료수 캔도 보인다. 혼란스럽다. 그러나 눈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입이 벌어진다. 벗어놓은 바지는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놓은 듯이 바닥에 놓여 있다. 셔츠의 단추들을 풀지 않고, 함께 입었던 스웨터와 같이 한꺼번에 셔츠를 벗어놓은 것은 예술에 가깝다. 왜 양말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으며, 침대 아래 바닥에 베개가 떨어져 있을까? 언제 본 것인지 모를 잡지들도 그 옆에 있었다. 아들의 고교 시절, 아들의 방은 늘 그랬다.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아니면 정리 정돈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여겼는지, 아들은 그렇게 방을 어질러놓고 다녔다. 종종 주말에 함께 버릴 것을 버리고 청소를 할 때면, 아들은 정리 정돈을 하는 것이 좋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서 안한다고 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고집했다. "이렇게 정리가 안되어 있으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찾기나 하겠니?" "제가 놓아 둔 것을 엄마 아빠가 옮기지만 않으시면, 저는 잘 찾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아들은 종종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잊고서 한참을 법석을 떨고는 했다. 그럴 때면 나의 입에서는 늘 같은 말이 나왔다. 사용한 물건은 항상 같은 자리에 놓고, 중요한 것은 함부로 방치하지 마라. 모든 물건은 종류별로 잘 모아두고, 불필요한 것은 버려라. 언제 누가 보아도 부끄럽지 않게 방을 보여줄 만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라. 나의 말이 그 당시 아들의 마음에 얼마나 깊이 울렸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아들이 방을 정돈하기보다는 계속 어질러 놓은 상태로 지냈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주변을 정리하라고 항상 이야기한 나의 의도는 아들이 방을 정리하여 깨끗하게 생활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들이 생활 전반에서 질서있는 의식을 가지고 매사를 처리하기 원했다. 불필요한 일을 가려내어 안하고, 반복적으로 하는 일은 일정한 방식으로 꾸준한 결과를 내도록 가르치고 싶었다. 반복적으로 하는 일을 하면서도, 매번 부산을 떨면서 새로운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쓰고 안정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유사한 것을 묶어서 함께 생각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때마다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선별하는 능력을 키워주고 싶었다. 소중한 것은 마음 깊이 간직하고, 함부로 내어놓지 않는 아들이 되기를 원했다. 누구나 눈에 보이는 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일을 오래 하면, 내면의 자기도 정리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 속이 정리되면, 하는 일도 체계적으로 하게 된다. 닥치는대로 눈 앞에 보이는 일을 하는 것과, 필요한 일을 생각하여 계획적으로 추진하는 것에는 큰 결과의 차이가 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정리를 하기보다는 편의성만을 염두에 두면서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뒤늦게 적절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키우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지도 모른다. 거기에 자기 주변을 깔끔하게 유지하는 것은 부지런함도 요구한다. 늘 주변을 둘러보면서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실제로 해야 한다. 다음에 하겠다면서 미루어 놓는 일을 반복하면, 우리 주변은 항상 어수선할 수 있다. 아들에게 해주었던 말들이 그래도 아들의 마음에 울렸음은, 후에 아들이 대학을 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방학을 맞아 집에 온 아들이 말했다.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는 친구 중 한 명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놀라울 뿐이에요." 그래도 애비 말을 들었구나. 그래도 무엇이 깨끗한 것인지는 아는구나. 김정수 에듀워싱턴 디렉터 info@eduwashington.com

2012-01-23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적극성과 창의력

"아빠, 그 선생님은 워낙 까다로우셔서 아무리 애를 써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어요." "얼마나 애를 썼는데?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원하던 성적을 못얻은 아들이 종종 푸념을 하면 나는 그렇게 아들에게 반응했다. 얼마나 공을 들여 숙제를 했으며, 수업을 철저히 준비해서 수업 중 참여하고 자신을 드러내었는가? 얼마나 많은 예상 문제를 풀어보고 시험에 임했는가? 나는 아들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자주 생각했다. 나의 눈에 고교 시절의 아들은 숙제를 우선하고 나면, 시험에 대비하여 '살짝' 공부 냄새를 맡고는 그 다음에는 대개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쓰는 모습이었다. 나는 말 그대로 아들이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좋을텐데 하고 자주 생각했다. 반면,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에는 열심이어서 어떻게 저렇게 애를 쓰고, 저것은 또 어찌 알았나 하고 생각했던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아들이 밤새 작곡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작곡을 하거나 편곡을 하다가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야말로 '적극적'이었다.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 작곡 소프트웨어를 어디선가(?) 구해서는 사용법을 익히고, 떠오르는 선율을 기록한 후, 악기를 배정하여 컴퓨터가 연주하게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는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또 아들은 자기가 편곡한 곡을 가지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조직한 합창단 단원들을 연습시켰다. 나중에 아들에게 비용을 지불하면서 작·편곡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는 아들도 자기를 지도해 줄 스승의 필요를 느꼈는지, 그래미상 등 큼직 큼직한 상을 받은 작곡가들에게 자기 곡을 보내어 지도를 받았다. "넌 어쩌면 그렇게 그 분들에게 연락할 생각을 했니?" "아빠, 너무 너무 하고 싶고 필요하니까 이렇게 한번 해볼까 하고 생각이 나더라구요." 아들을 보아도 그렇고 이웃의 학생들을 보아도 공통되게 느끼는 것은 적지 않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어떤 선 이상은 좀처럼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한계를 설정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마치 하루에 몇 시간 이상 공부를 하면 안되는 것처럼, 주말에는 공부를 안해야 하는 것처럼 생활을 할 때가 많다. 95점이든지 100점이든지 A만 받으면 같은 결과로 인식하여 굳이 100점을 받으려고 애를 쓰기보다는 95점을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생님을 찾고, 선배를 찾아다니는 정성이 아쉽다.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생각하다 보면 목표를 이룰 수있는 또 다른 방법들이 보인다. 그 이상 다른 길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새로운 길이 보인다. 남들이 못보는 것을 보면서, 자기만의 방법으로 끈기있게 잘하기를 고민 하다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나서면 창의적이 된다. 김정수 에듀워싱턴 디렉터 info@eduwashington.com

2012-01-17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Undecided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있는 모습을 보았으면..." "도무지 우리 애는 관심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무언가에 열정을 보이기를 희망한다. 좋아하는 것이 확실하게 있어서 열심히 집중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싶어 한다. 그러나 청소년들이 어떤 분야에 강한 흥미를 느끼면서 지속적으로 그 일에 관심을 가지기란 대단히 어렵다. 또 만족스럽게 결과를 내어가면서 자기 관심 분야를 추구하는 것은 실로 드물다. 부모들이 자랄 때 쓰던 말을 써서, 자녀가 '문과'인지 '이과'인지를 살펴보고자 해도 감이 오지 않는 경우조차 많다. 부모들은 자녀의 적성을 일찍 파악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자녀가 장래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자녀의 적성을 정확하게 일찍 알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자녀들이 어디에 소속됐느냐,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자녀들이 많은 영향을 받는다. 부모들은 종종 자녀의 타고난 적성과 이를 혼동한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좋아한다고 자녀의 적성이 무대 공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국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해도 자녀가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 쓰기를 좋아한다해도 반드시 저널리즘 분야에 적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부모의 섣부른 판단으로 자녀가 적성이 없는 길을 가도록 하게 한 후 나중에 후회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종종 본다. 뒤늦게라도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면, 그것도 또한 감사할 일이다. 자녀들의 대학 전공을 미리 생각하고 적성을 알아보는 것은 자녀의 장래와 인생에 관련된 것이어서 부모들이 일찍부터 신경을 쓰는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대학을 입학할 때까지도 자녀의 적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아주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입학 원서를 기입할 때도 전공 미결정(undecided)으로 표시하는 일이 많은 곳이 미국이다 . 입학한 후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성이 다른 곳에 있음을 알고, 전공을 바꾸는 일도 흔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또 직장을 정하면서도 처음 공부한 것과 다른 분야로 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자녀가 홀로서기를 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분야를 공부하여, 어떤 일을 직업으로 정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주제이면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오래 생각하고 해결할 일이다. 지나치게 간섭하여 매사를 부모의 뜻대로 주도하여 이끌어서도 안되며, 자녀의 뜻을 존중한다면서 마구 방치하여도 안된다. 조금 더 시간을 쓰고 노력하여 더 좋은 것을 얻을 길이 있다면, 지혜롭게 판단해 더 노력을 쏟아나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서로간의 신뢰이다. 부모의 삶으로부터 나오는 조언을 자녀가 들으려면 신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전공 미결정(Undecided)으로 대학을 진학하는 것이 큰 문제는 아니다. 두루두루 잘하니 무엇이 진짜 적성인지 못찾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고민이 아닐까. 또 다양한 환경을 경험하지 못해 자기 적성을 미처 못찾을 수도 있다. 시간을 두고 믿으면서 함께 찾을 일이다. 김정수 에듀워싱턴 디렉터 info@eduwashington.com

2012-01-03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어디까지 함께 할 것인가

"영어 시험이 언제니?" "다음 주 목요일요, 아빠." 대답과 동시에 아들은 달력에 표시된 날을 가리켰다. 아들 방의 달력은 고교 시절, 오래 시간을 들여 준비할 숙제와 시험 등의 일정이 표시되어 조금 지저분하기까지 했었다. 매일 새로이 알게 된 일정들이 나오면 우선 달력에 쓰게 했고, 수시로 보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도록 말했었다. 처음에 아들은 시큰둥하게 괜한 일을 한다면서 불평을 했었다. 그런데 아들도 시간이 가면서 그 효과를 실감했는지 달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랩탑 컴퓨터로 일정 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들이 여전히 할 일을 미루고, 종종 시험에 임박해 공부에 쫒기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 당시 나의 고민은 과연 '어떻게 아들이 스스로 자기 할 일을 계획적으로 하게 하는가'였다. 아들이 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를 우선 파악하고 나면, 아들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과 길을 이야기해주고 함께 하기도 했지만, 반복적으로 계속되는 일은 꼭 스스로 하게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가끔은 태만한 모습을 보아도 말을 않고 참으려 애를 썼다. 그런 태만의 쓴 결과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좋은 뜻으로 그렇게 시도하기는 했지만, 서툴고 아쉬운 부분이 많은 채 아들의 고교 시절이 지나갔다. 과연 부모는 어떻게 자녀가 시간을 사용하도록 이끌고, 어디까지를 함께 해야 하는가? 많은 학생들을 만나 일하면서 요즘 내가 생각하는 부모의 이상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는 스포츠 팀의 '감독'과 같은 모습이다. 우선 감독들은 경기와 관련하여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선수들에게 필요한 모든 가이드를 제공한다. 경기의 규칙과 기술, 작전, 상대 팀과 선수 및 경기장의 특성까지를 모두 알고 선수들을 이끈다. 나는 부모가 자녀들이 하는 공부와 각종 활동에 관해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감독들은 선수 개개인의 기량과 특성을 파악하여 선수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펼치면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승리를 꿈꾸며 도전하게 한다. 부모도 자녀의 특성을 제대로 알아 적합한 방법으로 노력하게 해야 한다. 세째, 감독들은 선수들의 부족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여 고치도록 한다. 작은 결점이라도 보완하여 선수가 발전하고 팀이 잘 되도록 가르친다. 부모 역시 자녀의 그릇된 점은 엄하게 지적하여 고치도록 해야 한다. 한번은 감독이 만든 규칙에 의해, 경기 중 실수를 한 선수가 관중이 보는 앞에서 팔 굽혀 펴기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저 선수가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공부와 성적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자녀가 고쳐야 할 잘못들을 지적하지 않고 방관하다가는 후에 그 자녀가 개인적으로나 사회 속에서 큰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셋째, 감독들은 선수가 경기력이 떨어진다해도 선수 대신 훈련을 하거나 경기를 하지 않는다. 체력이 약한 선수는 체력을 키우도록 하고, 기술이 부족한 선수는 기술을 익히도록 코치들에게 의뢰하여, 결국에는 선수가 혼자서 경기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지도한다. 부모들도 성장하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되, 자녀가 직접 하게 하고, 오래 오래 꾸준하게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기 할 일과 시간을 관리하는능력을 우선 익히면 좋겠다. 자녀가 부족한 점을 극복하고, 장기적인 발전을 이루도록 하려면, 자녀가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도록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스포츠 팀의 감독들이 선수들을 지도하는 방식을 참고하면 어떨까? 김정수 에듀워싱턴 디렉터 info@eduwashington.com

2011-12-05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타이거 마더

에이미 추아(Amy Chua) 교수의 저서 'Day of Empire'를 읽었던 것이 몇해 전이었다. 한 국가가 강국이 되려면 관용을 잃어서는 안된다면서 고대로부터의 소위 '제국'의 역사를 더듬어 나가는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모처럼 지적 호기심의 충족을 넘어 전에는 몰랐던 좋은 것을 또 하나 익히는 '호사(豪奢)'를 누렸었다. (다른 이가 애써 연구하고 오랜 시간을 들여 정리한 것을 단 번에 읽을 때 나는 '호사'라 할만큼 감사하고 기쁘다.) 그런데 그녀가 작년에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내어서 미국을 요동치게 했다. 'Battle Hymn of the Tiger Mother' 라는 책은 나오자 마자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 엄마들과 중국 엄마들의 교육 방식 차이를 화제로 만들었다. 그녀에 따르면, 아이들은 분별력이 없어서 어른들이 강력하게 지도하여 좋은 습관을 들이고, 또 하기 싫은 것도 참고 노력하다 보면 점점 잘 하게 되어 나중에는 즐길 수가 있다. 그래서 중국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엄하고 단호하게 할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미국 엄마들은 아이가 흥미가 없다면 강제로 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성취가 적고, 성취가 적으니 즐길 수가 없다. 그녀가 자신의 자녀를 지도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녀는 분명 극성을 넘어서 초극성 엄마이다. 그래서 미국 엄마들 중에는 에이미 추아 교수가 자녀를 교육하는 방식은 거의 자녀를 학대하는 수준이라고까지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녀의 성취를 위해 혹독한 지도를 하면서 정신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통의 미국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 부모들을 생각하면서, 한국 부모들이 더하면 더하지 중국 부모들보다 못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현대사의 급속한 경제 발전의 요구로 인하여 때로는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기도 했으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배운 우리였기에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런 추아 교수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여 가진 언론과의 대담에서, 자신의 지도 방식으로 인해 둘째 아이가 괴로워하면서 반항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난 후, 스파르타식 지도에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식을 더했다고 말했다. 엄마가 엄마의 만족을 위해서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둘째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마음을 바꾸게 되었고, 더 많이 아이와 대화하게 되었다. 추아 교수는 자신의 자녀 교육에 동서양의 좋은 문화와 방식을 점점 더 많이 혼합해 하고 있는 것 같다. 알려진대로 그녀의 유태인 남편은 아이들을 '방목'형으로 키우자고 하는데 반해, 추아 교수는 자신의 중국인 부모로부터 배운대로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하게 하면서 성취에 초점을 두고 이끌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장한 그녀 자신의 관점과 문화에는 아무래도 미국 문화가 섞여 있지 않을까? 나는 그녀의 교육 방식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정리된, 동서양의 장점이 혼합된 것임을 처음부터 상상했었다. 통합적이고, 융통성이 있는 사고 방식과 문화에, 목표를 정하면 끊임없이 노력하여 악착같이 달려드는 근성은 분명 아시아와 한국 교육의 좋은 면이라 하겠다. 반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하게끔 하는 미국식 교육은 개인의 책임감을 키워주고, 더욱 창의적으로 자녀들을 성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니 미국에 왔다고 한국식을 모조리 버리고, 평균적으로 정해진 계획만 지키려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한국식을 기억하면 좋겠다.

2011-10-17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 극성 부모가 되고 싶다

아들의 학교로부터 온 서류들을 항상 모두 읽고, 서명을 할 것들은 직접 해서 보내는 나를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은 모두 엄마의 몫인데, 아빠가 하는 것도 드문데다가, 아주 꼼꼼하게 읽고 내용을 확인하는 것도 보통의 부모들과 다르다고 했다. 자녀를 교육하는데 할 수 있으면 같이 하는 것이지, 엄마만 하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나는 늘 반문했다. 간혹은 나를 두고 극성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한번도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은 나를 극성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내가 물으면, 학원에 자녀를보내는지 여부로 극성인지 아닌지를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평균 수준 이상으로 자녀에게 관심을 쏟으면 그것이 극성이라고 했다. 그럼 평균 수준의 관심이란 무엇인지, 또 관심을 쏟는 것만으로도 과연 극성이라고 할 수 있는지 나는 쓸데없이 궁금했다. '극성맞다'는 말은 지나치게 적극적인 것을 말하는데, 자녀 교육에서 소위 '극성'이란 과연 어떤 수준을 일컫는 것일까. 자녀가 언어를 빨리 익히도록 자녀와 대화를 많이 하면 극성일까? 자녀의 공부를 돕고자 부모가 직접 자녀의 공부를 지도하면? 자녀가 보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도록 거주지역을 옮기면? 이사를 세 번 한 맹자의 어머니는 극성 어머니였을까? 자녀가 공부하는 동안 함께 깨어 밤을 지새우는 부모는? '극성'이라는 말은 지극히 상대적이고,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세미나에 가면, 자주 ' 이세상에는 똑똑한 자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한 부모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타고난 우수한 자녀보다는 부모의 관심과 지도에 따라 자녀가 성취를 더하고, 더 좋은 결과를 얻는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소위 '극성맞은 부모'에 관한 이야기도 얼마나 부모가 부지런하게 자녀의 교육을 위해 정보를 얻으며, 자녀를 더 성취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애쓰는가를 두고 서로 하는 이야기로 본다. 사교육을 하기보다는 부모가 직접 자녀를 지도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서 자녀와 함께 책을 펴고 문제를 푸는 부모를 보면서 아무도 극성맞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 부모가 매일 세 시간을 그렇게 하면서, 자녀가 한 문제라도 틀릴 때면 가만히 넘어가지 않고 질책을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녀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도록 하면서 훈련과 경기가 있는 날에 자녀를 태워다 주는 일은 그다지 두드러진 일이 아니지만, 유명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개인 코치를 찾아내어 별도의 연습을 시키면, 보통은 넘어선다고 할 사람들이 많다. 독서하는 자녀를 만들고자 늘 책을 읽히는 부모는 특별한 화제가 안되지만, 매월 반드시 다섯권의 책을 읽고 요약하게 하는 부모는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하는 부모들을 '극성'맞은 부모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부모들이 주어진 환경에서 저마다 능력과 여건에 따라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두고, 그것이 지나친지 아닌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나치다'는 말이 주관적으로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교육이 없던 시절과 비교하면서 오늘날 부모들이 모두 극성이라고 하면 누가 찬성할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남들처럼 그렇게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들을 극성맞은 부모들로 일컫는 것은 아닐까? 자녀가 그것을 감당하여 잘 따라오고, 부모의 여건도 그것들을 잘 감당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극성맞다고 여기는 것도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극성맞게 자녀를 이끌고 싶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여건이 되지를 않아서 그렇게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극성 부모가 되고 싶다.

2011-10-11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잠에 관하여 이중적인

“너는 도대체 몇시에 자니?”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면 늘 물어보았다. 아들은 그 때, 점점 힘들어지는 학교 공부때문에 많은 시간을 숙제와 시험 공부에 쓰느라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새벽에 잠자리에 들어 세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는 아들의 얼굴은 피곤이 가득했다. 직장의 위치가 아들의 학교와 가까운 덕에 아들의 고교 시절 동안 거의 매일 아들과 함께 출근을 한 나는 연일 차에서 자는 아들을 보아야 했다. 아들은 사실 잠을 아주 못 잔 것은 아니었다. 종종 학교를 다녀와 한 두 시간 정도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렇게 저녁 식사 전에 자는 날이면 아들은 새벽이 되도록 안자고 숙제와 시험 공부를 했다. 그리고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작곡을 하거나 학교 친구들과 부를 노래를 편곡하기도 했다. “잠을 안자면 학교에서 낮에 졸리니, 밤에 충분하게 자야지, 그렇게 하다가는 잃는 것이 더 많겠다.”내가 이렇게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밤에 많이 자든지, 학교 다녀와서 우선 좀 자고 새벽에 다시 자든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왕이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건강과 생활에 좋다고 생각했지만 아들은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온 밤을 새워 공부를 하기도 하고 이른 저녁에 세 시간씩 자기도 했다. 나는 아들의 수면에 관해서 몇 가지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나는 아들이 충분하고 효율적으로 수면시간을 관리하기를 바란다. 숙제를 하고 시험 공부를 하면서 주중에 잠을 편히 못 자고서는 주말이 되면 또다시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느라 잠을 안자는 아들을 보면서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해 최대한 충분한 수면을 취할 것을 누차 강조했다. 책을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어버리려는 아들의 성격은 내 눈에 종종 완급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음으로 되도록 밤에 자는 것을 권했다. 세상 사람들이 깨어 활동할 때, 개인도 깨어서 활동하고, 모두가 잘 때 자는 것이 개인의 사회 생활에 도움이 됨은 물론, 건강을 위해서도 밤에 자는 것이 좋다. 밤에 자는 동안 우리 몸 속에 건강에 유익한 물질이 생겨난다는 것과 컴퓨터 모니터와 조명 기구의 불빛이 우리 몸에 아주 해로운 것임을 일러주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할 일을 다 못했거든 잠을 줄여서라도 반드시 그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시간의 활용을 잘 하라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아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에 더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잠을 충분하게 자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을 아껴 공부하기를 원했으니, 공부를 더 해서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른 것에 우선했음을 고백한다. “충분히 자되, 할 일이 있으면 자는 시간도 줄여라?” 결국 나도 이중적인 아빠일수밖에 없다.

2011-04-04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베껴쓰기

“너, 남의 글은 절대로 베껴쓰지 마라, 알았지?” 지난 주에는 아들과 통화를 하면서 오랫만에 저작권과 표절(plagiarism) 이야기를 했다. 새리 홀위츠(Sari Horwitz)때문이었다. 새리 홀위츠는 퓰리쳐 상(Pulitzer Award)을 세번이나 수상한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신문의 기자다. 그녀는 단순 보도가 아니라 소위 탐사(investigation) 보도 영역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다. 명문 브린 모어 대학(Bryn Mawr College)을 나와, 영국 옥스포드대학교(Oxford University)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정치와 철학, 경제를 전공했다. 한 번도 아니고, 세번이나 그녀가 받은 퓰리쳐상의 수상 기사 중에는 2008년 버지니아공대 총기 난사 사건도 있다. 그런 그녀가 지난 3월 16일자로 3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다른 사람의 글을 베껴 썼기 때문이다. 지난 1월 8일 애리조나주에서 있었던 연방 하원 가브리엘 기퍼즈(Gabrielle Gifford)의원 총격 사건 관련 기사를 쓰던 홀위츠는 3월 5일과 11일에 애리조나 리퍼블릭(Arizona Republic)지에 실렸던 타인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 쓴 점이 인정되어, 회사와 함께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그리고 명예롭게 일했던 탐사보도부를 그만두었다. 그녀의 위상은 하루 아침에 땅으로 떨어졌는데 사실 매일같이 마감시간에 쫓기며 기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기자들은 누구라도 조금 방심하면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한다. 남의 글을 가져다 자기의 글로 만들어 쓰는 행위를 미국 사회는 가볍게 넘기지 않고 반드시 따져서 잘못을 가리고 책임을 묻는다. 대학원 과정으로 유학을 온 나는 수업 첫날에 “남의 글을 함부로 옮겨쓰지 않겠으며, 만일 그럴 경우 학칙에 따라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양식에 서명을 했다. 이후 공부하는 내내, 나의 글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오해라도 받을까 늘 조심하면서 과제물을 작성했던 것은 물론이다. 한번은 미국인 친구가 남의 글을 무단으로 베껴 쓴 것이 드러나 정학 처분을 받는 것도 보았다. 요즘은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의 과제물이 베낀 흔적이 있는지를 온라인의 몇몇 웹사이트를 통해 확인하기도 한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과 온라인으로 연결된 셀수 없이 많은 자료들을 대조한 후 남의 글을 옮겨 쓴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이런 웹사이트들을 사용하는 학교와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곳곳에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는 자녀들에게 타인의 저작물을 쉽게 옮겨 쓰게끔 유혹하고 있다. 자녀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스스로 하고, 천천히 완성하여야 할 일도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저 빨리 끝내고 싶어한다. 도서관에 가지 않아도 훌륭한 자료들이 온라인에 쌓여 있으니, 유혹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교육 현장의 지도자들은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공을 들이기보다는 온라인에서 남의 글을 베껴 살짝 바꾸는 일에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누가 알겠는가, 슬프게도 우리 자녀가 그런 일로 처벌을 당할지. 자녀들이 남의 글을 마구 옮겨쓰지 않도록 단호하게 지도하는 한편, 스스로 조사하여 글을 쓰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하겠다. 김정수

2011-03-28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초면에 자녀자랑하는 부모들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자신의 자녀 자랑을 늘어놓는 분들이 있다. 얼마 전 처음 만난 한 분은 6학년인 아들이 미국에 온지 2년 만에 학교의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다고 하면서 아들의 총명함을 자랑했다. 나는 그 분이 아들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알기에 그만큼 기쁨이 크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격려의 인사를 전했다. 전에 뉴욕에 갔을 때는 한 여성 분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딸이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국제 기구에서 일하게 되었다면서 자랑스럽게 딸 이야기를 해서 조용히 들었던 적이 있다. 이뿐이 아니다. 살아가다 보니 많은 분들이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자녀 자랑을 한다. 미국인도 한국인도 모두 그렇다. 왜 모르겠는가? 우리의 자녀 자랑이 기쁨과 감사의 표시라는 것을. 세상의 기쁨 가운데에서 자녀가 자기 할 일을 잘 하고 좋은 결과를 내어서 느끼는 기쁨만한 것도 드물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학교에 진학하거나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고 뛰어난 재능으로 상을 받는 경우에 부모는 자신이 그 일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기쁘다. 자랑 거리가 있는 부모들은 그래서 누군가가 자녀에 관해 물어 봐주기를 기다릴 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만나면 우선 자녀의 이야기부터 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를 알려주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만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는 우수하고 뛰어난 자녀들보다 보통의 자녀들이 더 많다. 학교 성적이 모두 A 인 자녀보다는 그렇지 않은 자녀들이 더 많다.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 학교를 가는 자녀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자녀들이 훨씬 많다. 어느 부모가 자녀가 잘 되지 않기를 바랄까마는 세상의 자녀들 중 일부만이 부모의 바램대로 결과를 내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자녀 자랑을 할 수 있는 부모들은 그리 많을 수가 없다. 그래서 처음 만난 처지에 자녀 자랑을 할 경우 적지 않은 분들이 당혹해 하거나 심지어는 불편해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내 입으로 먼저 자랑을 늘어놓지는 말자. 누군가가 처음 만났는데 우리 앞에서 자신은 아주 좋은 집에서 산다거나,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쁘다면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 것인가? 물론 잘 알고 지내는 사이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좋은 일도 힘든 일도 서로 나누면 더욱 좋다. 아는 분의 자녀가 공부 열심히 한다는 소식은 늘 나를 기쁘게 한다. 자녀가 장학금을 받고 명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부모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들이 나의 아들을 걱정해 주었고, 그 덕에 나의 아들이 잘 자라는 것이라 여기니, 그들의 자녀 소식도 내 아들 소식과 다름이 없다. 아들을 이끌며 알게 된 것들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아들의 교육에 활용한다. 자랑이란 그저 자랑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면서 함께 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종 초면에 자녀 자랑을 하는 부모를 만나도 기쁘게 들어주고 격려해 주었으면 좋겠다. 한국을 떠나 낯선 곳에 와서 자녀를 교육시킨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더구나 다른 문화에서 자라면서 미국인처럼 생각하려는 자녀들을 지도해서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이 당신의 앞에서 자녀 자랑을 늘어놓아도 웃으면서 들어주자. 그 자녀들을 축복해주자.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지 않은가? 김정수

2011-03-14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선생님 마음대로

“아빠, 선생님이 진짜 마음에 안들어요”, “그 선생님은 항상 어렵게만 가르치세요” 아들이 이런 이야기들을 할 때마다, 나의 대답은 늘 같았다. 그래도 어떡하니, 네가 더 잘해야지. 아들의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서 자기를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에 대한 불평과 원망도 늘어났다. 가끔 하기는 했어도 이전에 비해 횟수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스승을 존경하고 감사하도록 이끌었지만, 열심히 준비해 제출한 숙제에 좋은 점수를 안주시거나, 까다롭게 시험 문제를 출제하시는 선생님에 대해서는 불평을 했다. “너는 학교 처음 다니냐? 까다로운 선생님 만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나는 불평하는 아들에게 한 마디 하면서, 자신의 부족을 남 탓으로 돌리려는 마음에 경계를 했다. “선생님이 안가르치신 것을 시험에 내셨니? 아니면 교과서에 안나오는 것을 문제로 내셨니?” 나는 아들에게 늘 자신을 우선 돌아보고 반성할 것을 요구했다. “너는 지금 불평하는데, 그 시험에서도 좋은 점수 받은 아이들은 있어, 잊지 마.” 그 아이들은 선생님의 의중을 다 알아서 그만큼 준비할 것이다. 그러니 너도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답안을 쓰고,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과제물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들에게 자주 말했다. 만일 과제물을 제출하는데, 선생님께서 시간을 많이 주셨다면 그것은 더 많은 주의와 준비를 요구했다. 소위 ‘프로젝트’라고 해서, 수 주일의 시간을 주면서 부과되는 과제는 매우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했다. 고학년이되어서는 스스로 척척 했던 과제들이었지만, 저학년 때는 종종 함께 머리를 짜내어야 했다. 아울러 선생님들의 방식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방식을 우리는 함께 익혔다. 미국의 선생님들은 구체적이고 정확한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그래서 찬성이나 반대를 선택하라고 하면 반드시 둘 중 하나를 골라서 의사 표명을 해야지, 양 쪽의 좋은 점을 절충해서 정리해서는 안되었다. ‘하나’를 쓰라고 하면 하나를 써야지 둘을 쓰면 점수를 잃었다. 조사해서 정리할 것을 주욱 리스트로 만들어 주시면, 과제물 안에 반드시 그 내용들이 들어가야 했다. 제출한 과제물에 점수를 매겨 돌려주실 때마다 꼼꼼하게 붙어있는 선생님의 지적들을 토대로 깨달은 것은 ‘지시대로 할 것, 반드시 지시대로 할 것’이었다. 저학년 시절, 프로젝트 과제가 부과되면 우선 열심히 준비만 했던 아들도 고학년이 되어서는 ‘선생님이 원하시는대로’ 과제를 준비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시간을 사용했다. 아들은 꼼꼼하게 과제물 제출 가이드를 읽으면서, 자신이 하는 준비가 선생님의 요구에 맞는지를 확인했다. 선생님의 채점 과정을 의식해서 과제물 제출 가이드에 나온 순서대로 과제물을 준비했다. 충실하게 준비했는지를 채점하시는 선생님의 표준은 역시 과제물 제출 가이드이며, 그래서 채점하실 선생님께서는 하나 하나 가이드에 있는 리스트대로 내용을 점검하실 것이니 내용의 순서도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고 선생님의 의중을 헤아려 준비한 과제는 늘 좋은 점수를 받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제자는 스승의 의중을 헤아려야 한다. 세상의 많은 다른 길을 마다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길을 가시는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훌륭하지만 그들의 가르치는 방법은 모두 다르다. 제자들에게 바라는 바도 다르다. ‘선생님 마음대로’이다. ▷문의 및 도움말: jeonsu_kim@hotmail.com

2010-11-15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부자는 이신전심

군에 있을 때 주민 등록 등본이 필요한 적이 있었다. 집으로 전화해서 우편으로 보내주실 것을 말씀드렸는데, 아버지께서 며칠 후에 보내주셨다. 그 날, 집으로부터 온 편지 봉투를 받아서 여는 나의 마음 속에는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 주민 등록 등본 외에도 아버지로부터의 소식 한 줄이 은근히 기대되었다. 그러나 봉투를 여니 주민 등록 등본만이 있었고 나는 아버지께서 바쁘셨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군에 있는 아들에게 필요한 서류를 보내면서, 안부를 묻고 전하시면 더 좋았을 것을. 아버지는 그렇게 무뚝뚝하셨다. 나는 눈에 익은 아버지의 필체가 봉투에 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요즘 LA에 있는 아들이 이메일을 종종 한다. 아들의 이메일은 매우 짧다. 한 줄의 인사, 한 줄의 안부 묻기, 한 줄의 용건 등이다. 늘 대화는 우리말로 하지만, 영어로 이메일을 쓰는 아들이다. 처음에는 매우 바빴는지, 그나마 이메일도 자주 없었는데, 이제는 일상을 종종 알려온다. 아들이 찍어 보내는 사진은 말없는 대화이다. 분주히 캠퍼스를 오가며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다가도 애비 생각을하면서 찍었을 사진을 대하면 마음이 훈훈하다. 한 번은 이메일이 와서 열었더니, 내가 감명 깊게 보아서 아들이 어릴 때부터 자주 이야기해주었던 영화의 포스터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영화 음악과 게임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매일 공부하는 곳에는 당연히 영화 관련 사진과 포스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입학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사진과 포스터들이 자세히 눈에 들어 온 모양이다. 강의실 오가는 길에 걸음을 멈추고, 애비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를 발견한 아들이 일부러 사진을 찍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함께 그 영화를 보면서 영화 곳곳에 보이는 작은 부분들이 감독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음악만을 다시 들었던 것은 아들이 7학년 때였다. 당돌하게 학생 회장 선거에 나갔지만, 8학년 후보에게 져서 속상해 하던 때 나는 아들과 그 영화를 보았다. 나는 수도 없이 본 영화지만 아들은 그 때부터 그 영화를 몇 차례 본 것 같다. 일상에서 늘 대화를 하면서 많은 주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던 아들은 대체로 자기 주장을 펼쳐서 나를 설득하려 했는데, 영화를 본 후의 감상도 예외없었다. 그 무렵이 부모와 어른들에게 반항적인 시기여서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영화와 음악을 놓고도 다른 시각을 확인했었다. 아들이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도록 장려하고 이끈 것을 종종 후회할 정도로 아들은영화와 음악도 다른 시각에서즐겼다. 나는 보편성을 잃은 개성이 인정받을 수 없음을 자주 말하면서 아들과 대화했었다. 훗날 이 놈은 그 영화를 어찌 기억할까? 나와 같은 시선으로 영화를 봤어야 기억도 따뜻할텐데. 나는 소심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발견한 영화의 포스터 사진을 아들이 이메일로 보내오자, 아들이 그래도 나와 함께 본 그 영화를 의미있게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해서 미소가 지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아들이 이 영화의 포스터를 찍은 사진을 보내 온 이메일에 아무 말도 없이 물음표(?)만을 제목으로 보내 온 것이었다. 아무 내용 없이 사진 한장이 있는 이메일에 제목이 물음표인 이메일. 눈을 씼고 찾아보아도 안부 인사 한 줄 없는 이 이메일에 나도 즉시 답을 했다. 나의 회신은 느낌표(!)였다. “아빠, 아빠 좋아하시는 영화 포스터가 있네요, 아들이 찍어 보내는 사진을 보시니 기분이 어떠세요?” “멀리서 분주한 중에도 아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니 정말로 고맙구나!” 우리는 무뚝뚝한 부자인가, 간결함을 즐기는 부자인가? ▷문의 및 도움말: jeonsu_kim@hotmail.com 김정수

2010-11-08

[학부모 칼럼] 된장아빠의 버터아들 키우기…부모의 꿈, 자녀의 꿈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었을 때, 나는 아들이 후에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유명 대학에 진학할 것을 꿈꾸었다. 성적표의 대부분 과목들이 A를 기록하는 일이 수년간 계속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성적이 곤두박칠치면서부터는 서서히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아들은 나의 생각처럼 자기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 성적표를 염두에 두고 공부하기보다는 자기 좋아하는 것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들에 대한 나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이 되어가고 있는 듯 했다. 한편, 아들은 자기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시간을 쓰면서, 성적을 잘 관리하기보다는 학교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매 학기마다 연극, 뮤지컬, 합창, 재즈 밴드 등에 참여했고, 작곡과 편곡에 재미를 붙인 후로는 자기가 조직한 남성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의 대부분을 직접 편곡했다. 막 조직한 팀을 이끌고 교외 합창 경연대회에 나가서 입상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지역의 다른 고등학교 콘서트에서 연주되는 곡들을 편곡하기도 했으며, 영화 음악과 게임 음악을 작곡하여 상을 받는 유명한 현역 작곡가들에게 자기 곡을 보내어 평가를 받기도 했다. 대학 입학 원서를 낼 때, 나는 아들이 조금이라도 더 인정받는 유명 대학을 가기를 원했던 반면, 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전공 분야의 최고 학교에 가기를 희망했다. 결과는 아들이 원하는대로 만들어졌다. 대학 입시만 가지고 보면 현재까지 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들의 꿈은 이루어졌다. 어떤 꿈이 이루어지고 어떤 꿈은 그저 꿈으로 사라질까? 자녀가 부모의 뜻을 따라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유지하여 세상에서 인정받는 학교에 진학하는 것만이 교육의 목표는 아니지만, 자녀가 일반적인 학과 공부에 전념하여 유명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것은 대부분 부모들의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을 자녀가 함께 인식하고 같은 마음으로 준비하여 함께 원하는 결과를 내는 일은 매우 드물어 보인다. 나는 부모로서 오직 내가 원하는 대로만 아들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좋은 성적을 내도록 이끄는 것과 동시에 항상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찾도록 아들에게 요구했었다.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공부하면서, 자기 전공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프로그램이 있는 곳으로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세상에서 인정받도록 뛰어난 조건을 만들 것을 바라면서도 자기가 진정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아들이 좋아하기를 바랐음을 고백한다. 아들은 자기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어 고집스럽게 나를 설득하고 결국은 그 전공을 공부하러 로스 엔젤레스로 떠났다. 막연하게 아들이 유명 대학에 가기를 바랐던 나의 꿈이 사라지는 동안 아들의 꿈은 현실화되었다. 아들은 나를 설득하는 무기로 내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사용했다. “세상에서 알아주는 학교에 가는 것도 좋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많은 부모들은 여전히 대학 졸업장이 개인의 능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일단 유명 대학에 자녀가 입학하기를 희망한다. 자녀의 적성에 관한 생각도 물론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유명 대학으로 자녀가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부모의 이런 꿈이 자녀의 꿈과 일치하기는 매우 힘들다. 자녀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지만, 자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가운데,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계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자녀의 꿈이 부모의 꿈과 다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 있다. 그래서 부모의 꿈과 자녀의 꿈 가운데 하나만 이루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의 및 도움말: jeonsu_kim@hotmail.com 김정수

201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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